"너 그러다 큰일낸다."
수련터에 가다가 좁은 길 중간에서 개를 만났다. 나랑 개가 마주섰다.
개 주인이 뒤에 서 있는 걸 보고 개를 당겨서 자기앞에 두고 비켜주겠지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개 주인이 멀뚱히 나를 보고 있다.
이 아저씨는 개를 잘 못 키우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뒤로 물러섰다. (사실 이러면 안된다.)
물러서기 무섭게 개가 짖는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는 한, 개는 원래 그러게 되어있다.
그러면 주인은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줄을 당겨서 자기쪽으로 개를 돌리고 그자리에서 개를 진정시켜야 한다.
그런데 개 주인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내가 물러서서 큰 길로 나오자 개를 앞세워 나오면서 개한테 "착하지. 착하다 우리 ㅇㅇ. 착한 아저씨야. 짖지마. 짖지마."
이러고 간다. 그래서 내가 개를 보며 한 말이 이 글의 첫번째 문장이다. "너 그러다 큰일낸다."
큰일나는 게 아니라 내는 것이다. 앞으로 사람을 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실 개한테 한 말이 아니라 주인에게 한 말이다.
아마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알아들을만한 주인이었다면 처음부터 행동을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는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사람의 행동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애완견,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려면 개를 가르쳐야 한다.
배변훈련이든, 산책을 시킬 때든, 밥을 줄 때든, 놀아줄 때. 일상이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개가 사람을 해치게 되든, 사람에게 다치게 되든 큰일이 난다.
오늘 또 이런 장면을 접하게 되어 기록을 남긴다.
내 수련의 일상 또한 마찮가지이다.
일상이 수련의 연속이다. 순간순간 이런 장면을 잡아내고 분석하는 수련은 교육을 하면서 더하게 되었다.
장면에서 내가 더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니. '사람의 선택'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하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것이 내가 사람을 대하는 척도를 만들어 나간다. 이것은 일을 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한다.
태극권의 수련은 그런 일상의 순간을 잡기 위한 몸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정신은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일을 '잘' 할 수 있다. 몸이 바로 서면 정신이 온전히 깃들기 쉽다.
육체는 언젠가 쇠하게 마련이지만, 바른 육체에 깃든 정신이 남긴 흔적들이 그 삶에 녹아나게 된다.
내 수련은 그것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오늘도 태극권 37식을 연습했다. 같은 권가를 매일매일 해도 지겹지 않다. '답습'의 즐거움이다.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혀서 동작전환할 때 흐름이 끊겨도, 그런 내 몸의 상태를 관조할 수 있어서 좋다.
매일 몸을 조금씩 더 깨울 수 있어 즐겁기만 하다. 더 깨울 수 없을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심기체'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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