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타성에 젖어갈 때도 있고, 하나씩 발견해가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희로애락미발지심. 중용을 표현한 그 문장에 가깝게 정신이 변해간다.
희로애락부득지심이 아니다. 희로애락무심도 희로애락비발지심도 아니다.
열병기가 나오고 난 뒤 동양의 무술이 살상의 목적을 잃고 또다른 연구로 나아간 것이 철학적 몸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슈는 투로에 집중하고 경기투로를 개발하고,(그것이 실제 우주의 표현에 얼마나 연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산타 또한 서양의 격투기방식에서 차용해온 규칙을 사용하도록 변화했다.
이것은 진보일까 퇴보일까. 어떤 방식이든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은 '진화'라 하겠다.
다만 그 진화의 선택이 옳고 그른 것은 진화의 결과가 보여주게 될 것이다.
37식 중 단 한 가지가 있는 퇴보(뒤로 걷는)형태의 권형이 바로 '도련' 혹은 '도련후'라고 부르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과연 앞과 뒤 어느쪽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몸은 뒤로 빠지는데, 중심과 힘은 앞을 향하고 팔을 앞으로 반대쪽 발은 뒤로 향하고 있다.
그렇게 전체적인 균형이 맞아들어가는 동작이다.
이 것은 왜 연습하게 되는 것일까? 물러서더라도 상대를 견재하라고?
아니면 밀고들어오는 상대의 예봉을 꺾으라고? 그것도 아니면 사량발천근의 응용인가?
명경과 암경의 사용을 연습하라고?
모두 맞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
태극권은 '체(몸)'를 만들고 나면 '용'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체와 용의 수련이 분리된 희귀한 권이 태극권이다.
다른 외가권에 비해서 짧은 기간, 아무리 근기가 높아도 하루아침에 배워 써먹기가 별따기다.
그런데 왜 하는가? 그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무술이든 한국무술이든 이런 술과 예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일정 정도가 지나면 반드시 한 번은 생각하게 된다.
왜 나는 이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 이렇게 수련을 하고 있고, 앞으로 수련하고 싶은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앞으로 수련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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